
레디메이드 인생은 채만식 선생께서 90년 전인 1934년 5월 발표하여 7월까지 연재한 소설의 제목이다. 세계적 대공황으로 인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도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수많은 청년을 채만식 선생은 팔리기를 기다리는 기성품 인생으로 그려낸 것이다.
작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P는 포켓 속에 손을 넣고 잔돈과 지폐를 섞어 삼 원 남은 돈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왼편 손으로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삼 원을 곱쟁이 쳐보았다.
육 원 십이 원 이십사 원 사십팔 원 구십육 원 백구십이 원 팔 원 모자라는 이백 원…… 사백 원 팔백 원 일천육백 원 삼천이백 원 육천사백 원 일만 이천팔백 원. 팔백 원은 떼어 버리고 이만 사천 원 사만 팔천 원 구만 육천 원 십구만 이천 원 삼십팔만 사천 원 칠십육만 팔천 원 일백오십삼만 육천 원…….
삼 원을 열여덟 번만 곱집으면 일백오십만 원이 된다. 일백오십만 원 그놈이 있으면…… 이렇게 생각하매 어깨가 으쓱해졌다.
삼 원의 열여덟 곱쟁이가 일백오십만 원이니 퍽 쉬운 것이다…… 그놈만 있으면 백만 원을 들여서 오십 전짜리 십육 페이지 신문을 하나 했으면 우선 K사장의 엉엉 우는 꼴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과 위 내용을 17년도 여름에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날부로 내 뇌 한 구석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내가 저축해놓은 돈을 한 번 곱하면 얼마가 되고, 그걸 또 곱하면 얼마가 되며.... 열여덟곱쟁이가 아니라 여덟 곱쟁이 정도만 해도 벌써 300억 가까이 된다. 나의 저축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얼마간 더 곱해본다고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나의 암산은 늘 300억 근처에서 끝난다. 마치 내게 필요한 돈은 딱 그 정도라는 듯이.
이 암산은 또 다른 잡생각으로 이어진다. 만약 내게 300억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큰 돈을 마음껏 쓰는 상상은 뒷맛이 씁쓸하지만 그래도 그 동안은 즐겁다. 누군가는 세계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요트 하나 가득 창녀를 불러 즐길 수도 있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꿈꿔본 적도 없는 비싼 위스키 한 병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킬 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에는 300억이 생기면 큰 집을 짓고 싶다. 그리고 그 집 1층에 매일 친구를 불러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보드게임을 하면서 살고 싶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체스나 카드 게임의 대회를 열어보고 싶고, 또 가끔은 훌륭한 재즈 뮤지션을 초빙해 마당에서 친구들과 작은 음악회를 열고 싶기도 하다.
이런 망상을 계속하다보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란 아퍄트야 말로 인생의 궁극적 목표라는 듯 굴고 있지만, 그리고 나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존재이지만, 사실 충분한 돈을 쥐여주면 아파트고 나발이고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살지 않을까. 내 경우는 그게 여행도 아니고 사치도 아니고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권력을 쥐여주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큰 돈을 쥐여주면 그 사람의 취향을 알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더 읽어보기
2024.12.16
책이라는 이름의 지도와 그 축척에 대하여
이 책은 한국에서 <대항해시대 최초의 정복자들>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정복자들 : 포르투갈은 어떻게 첫 전지구급 제국을 건설하였는가>이다. 그런 만큼 대항해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1497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원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전…
2024.12.07
한국 사회와 <좁은 회랑>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9월 23일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여 10월 17일에 다 읽었다. 그 사이에 공저자 두 분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시게 되어, 나는 졸지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저작을 읽게된 꼴이 되었다. 누가 상 받았다고 책 찾아 읽는 사람이 아…
2023.08.17
인두껍을 쓴 외계인과 <파운데이션> 시리즈
총 7권으로 구성된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는 명작이다. 이 시리즈를 한데 묶어주는 개념은 단연 ‘심리역사학’이다. 위대한 수학자 해리 셀던에 의해 고안된 이 학문은 과거와 현재의 인간 집단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미래에…
2023.07.15
서책의 선과 <장미의 이름>
에코의 저작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호학자로서의 명성과 이 책을 여러 번 읽은 지인들의 ─ 주로 독서 난이도에 대한 ─ 경고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읽어야겠다 생각만 하고 주저하기를 여러 달이었다. 두 권 합쳐 900여 페이지나 된다는 것도 저어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2026.04.11
Trie 자료구조
문자열 데이터를 다룰 때 단순히 “이 단어가 있나?”만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있다. 자동 완성처럼 특정 접두사로 시작하는 후보를 모아야 할 때도 있고, 어떤 키에 값을 두고 빠르게 찾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 가장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자료구조가 바로 Trie이다.Trie는 무엇…
2026.03.19
Streams API 부록 2. 왜 이미지는 위에서 아래로 나타날까
웹 페이지에서 이미지를 로드할 때 흥미로운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미지가 한 번에 완전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조금씩 채워지면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네트워크가 느리거나 이미지가 큰 경우 이런 현상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마치 이미지가 위쪽부터 스캔…
2026.03.19
Streams API 부록 1. HTTP 다운로드 진행률은 어떻게 계산될까
파일을 다운로드할 때 가끔 몇 퍼센트 진행되었는지 혹은 진행 막대(progress bar)가 조금씩 채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다운로드가 이런 식으로 진행률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다운로드는 퍼센트가 표시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진행 막대 없이 로딩 스피너만 계속…
2026.03.13
Streams API 4. 왜 모든 언어에는 Stream API가 존재할까
Streams API를 공부하다 보면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JavaScript에서 ReadableStream, WritableStream, TransformStream을 살펴보고 있는데, 어딘가 낯설지 않다. Java를 써 본 사람이라면 InputStream, OutputStre…
댓글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