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듄>의 존재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접하게 된 것은 책이 아니라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가 먼저였다. 이미 고전이 되었다 할 수 있는 <듄>의 영상화 작업이고, 믿고 볼 수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이며, 주목받는 신예 ‘티모시 샬라메’의 출연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오스카 아이작’이 출연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극장에 방문할 이유가 충분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올 때쯤에는 이미 <듄>을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침 황금가지에서 프랭크 허버트가 작업한 <듄의 신전>까지를 새로 개정하여 여섯권 짜리 신장판을 내놓았다. 나는 전권을 구매하여 ─ 늘 그렇듯 한 번 잊었고 올해 3월에 ─ 읽기 시작했다.
들었던 것처럼 영화의 내용은 1권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절반이 파트 2로 개봉하게 될 것인데, 책의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게 된다면 영화 역시 기대해볼만할 것이다. 총 여섯 권으로 이뤄진 시리즈의 단 1권만 읽었을 뿐인데도 나는 왜 사람들이 <듄>을 명작이라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권 또 다음 권으로 독서를 이어나갔다.
2권은 쉬어가는 느낌으로 300페이지 남짓이었지만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전부 700페이지에서 많으면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다. 내용을 정리해보면 사실 ‘이렇게까지 두꺼울 이유가 있나?’ 싶어질 정도로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했다 싶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많은 않았다.
4권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나는 5권 읽기를 세 번 시도했고 세 번 다 실패했으며 네 번째 시도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듄>은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이야기이다. 황제의 명을 받아 모래 행성 ‘아라키스’로 건너온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과 암살자 전쟁에 휩쓸려 아버지를 잃고 사막 민족의 도움을 통해 퀴사츠 해더락으로 거듭나는 폴 무앗딥(1권)이 어떻게 흥하고 망하는지(2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코리노 가문의 암살을 피해 죽음을 위장하고 사막에서 신황제로 거듭난 레토 아트레이데스 2세(3권)가 3천년에 걸친 시간 동안 우주를 지배하며 이뤄낸 것과 그 최후(4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5권부터는 갑자기 생과 사를 셀 수 없이 반복한 던칸 아이다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아이다호는 이름만 같을 뿐 사실상 이전의 모든 아이다호와 연결점이 없다. 즉, 1권부터 4권까지의 듄 시리즈와 5권부터의 듄 시리즈는 공간적 배경만을 같이할 뿐, 실질적으로는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 프랭크 허버트가 <듄>을 구상할 때 폴 무앗딥의 멸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열광적인 팬이 생겨버릴 만큼 흥한 시리즈물에서 꽤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셜록 홈즈 시리즈만 봐도 아서 도일 경(홈즈 쓰기 싫어)과 셜로키언들의 기싸움(뒈지기 싫으면 홈즈 계속 써라)은 유명하지 않은가. 셜록 홈즈의 경우 새로운 사건만 있다면 복귀는 언제든 가능하겠지만 ─ 심지어 작가가 죽어도 앤서니 호로비츠를 통해 복귀한 홈즈 시리즈도 있으니까 ─ 폴 무앗딥은 2권을 끝으로 깔끔하게 퇴장하였으니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찌저찌 이야기의 주인공을 폴 무앗딥에서 아트레이데스 가문으로 바꾸기는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4권에서는 가문의 대가 끊긴다.
전쟁 용어 중에 ‘공세종말점’이라는 게 있다. 공격자가 더는 공세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시점 이후로 공격을 계속 이어갈 경우 물자가 부족해지거나 사기가 급속도로 하락해 방어자의 역습을 받기 쉬운 상태가 되고,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질 위험도 커진다.
이와 비슷하게 시리즈에도 ‘집필종말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집필종말점 이후로도 계속 집필을 이어 나가게 될 경우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재미가 떨어지거나 하여 비난받기 쉬운 상태가 되고, 시리즈 전체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 위험 역시 높아지는 것이다.
아서 도일 경은 집필종말점 이후 7년간 홈즈를 쓰지 않으면서 아이디어 부대를 재편하고 재집필에 성공했지만, 프랭크 허버트는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들이 4권까지 듄을 꽤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 1권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지 루카스가 ‘소년이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떠올릴 때, ‘원주민들이 이것저것 뒤집어쓰고(프레멘 / 터스켄 약탈자) 뚱뚱한 나쁜놈이 지배하는(하코넨 남작 / 자바 더 헛) 모래행성(아라키스 / 타투인)에서 사막에 사는 사람(스틸가 / 오비완 캐노비)의 도움으로 신비로운 무언가(멜란지 / 미디클로리언)를 통해 단일 인간의 정신에 은하를 하나로 묶을 힘(예지력 / 포스)이 생기게 되는’ 플롯을 선택한 건 분명 <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타워즈>는 사실상 <듄>의 쌈마이 무협 맛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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