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금없는 기억에서부터 출발해보려 한다. 예전에는 서양에 대한 한류의 영향력을 설명할 때 ─ 최근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 어떠한 사전을 언급하는 인터넷 기사가 더러 있었다. 불고기나 김밥, 먹방이나 K-드라마가 해당 사전에 등재되어있으므로 이것이 곧 한류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절대적인 증거가 아니고 뭐냐는 식이다. 물론 이것이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는 단어를 따로 모아둔 기록소 개인 사전 같은 거였다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전의 이름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 흔히 OED로 불리는 이 사전은 BBC에 따르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어사전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단어 탐정>은 제임스 머레이 경으로부터 시작한 OED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역사 속에 당사자로 존재했던 OED의 편집장 존 심프슨 개인의 에세이이기도 하다. 게다가 에세이 속에는 작가가 사용한 어휘에 대한 ─ 작가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 “단어와 역사와 용법에 대한 작은 담론이 양념처럼 뿌려”져 있다. 표지 한가운데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다양한 단어들이 바로 본문에서 언급되는 ‘양념’들이다.
OED가 변해가는 과정과 편집장 개인의 이야기, 그리고 단어의 역사와 용법이라는 전혀 다른 듯한 세 개의 핵심은 오랜 시간 글자와 문장을 다뤄온 작가의 개인적 능력과 더불어 곳곳에 ─ 아마도 의도적으로 ─ 배치된 유머러스한 내용들로 인해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 속에 녹아든다. 일반적으로 단어의 역사적인 부분을 살피는 책들의 경우 기원이 아주 오래된 단어들 위주로 구성되는 편인데, 이 책은 OED 신조어 사전을 편집했던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 selfie와 같은 ─ 신조어들의 어원까지도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지속해서 언급되지만 OED는 ‘역사적인’ 사전이다. OED의 존재 자체가 역사적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단어의 역사적 변천과 문헌상에서 최초로 기록된 ─ 것으로 일단은 확인되었지만 언제든 더 오래된 문장이 발견될 수 있는 ─ 문장을 같이 싣는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예전에 XSFM의 UMC가 ‘외국에는 사전들이 어원에 대해 굉장히 자세히 연구해서 싣는데 국어사전에는 그런 게 별로 없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영미권에는 어원에 대한 서적이 많고, 그에 대한 번역본 ─ 가령 트위터에서 꽤 입소문을 탔던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이라거나 ─ 들도 꽤 팔리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어의 어원을 다루는 컨텐츠는 ─ 전문가 수준에는 있겠으나 ─ 교양 수준에서는 흔하지 않으며 ─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은 까닭은 최근 군 전역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한 향문천과 같은 유튜버들이 그 희미한 교양 수준의 층위를 이루어주고 있기 때문에 ─ , 이러한 점은 영어만큼이나 한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퍽 아쉬운 데가 있다.
어떤 단어든지 조금만 시간을 낸다면 그 단어에 역사가 있고, 그 역사가 동시에 영어로 들어오거나 발달한 다수의 다른 언어들의 역사와 유사하며, 수 세기에 걸쳐 시대에 따른 사람들과 나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패턴이 언어에 존재한다. 그 어떤 단어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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